본국검법
● 본국검법의 세법
이 검법은 우리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수록된 24기(技) 중의 하나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칼춤의 희(戱)라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황창(黃昌)은 신라 사람이다. 속설에 전하기를 나이 일곱에 백제의 시중(市中)에 들어가 칼춤을 추니 구경하는 사람이 담처럼 들러쌌다. 백제왕이 이 소문을 듣고 황창을 불러서 칼춤을 추라고 하였다. 황창은 기회를 보아 왕을 찔렀다. 이에 백제인들이 그를 죽였다. 신라인들이 이를 슬퍼하여 그의 얼굴 모습을 본떠서 가면을 만들어 쓰고 칼춤을 추었는데 그것이 지금도 전한다.’
또한 ‘왜(倭)가 신라와 인접해 있으므로 검기(劍技)와 검무(劍舞)가 반드시 전하여졌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황창이 신라 사람인 것은 확실하나 화랑인지 아닌지, 또 어느 왕 때의 인물인지 알 수 없으며 ≪무예도보통지≫나 ≪동경잡기(東京雜記)≫는 ≪동국여지승람≫을 인용한 것 같은데, ≪동국여지승람≫은 어떤 문헌을 참고하였는지 밝히지 않았고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전혀 황창의 이름이 보이지 않아 더 이상의 고증은 어렵다.
상기한 것과 다른 몇가지 기록들을 종합하여 <본국검법>의 배경과 그 유래를 알아보기로 한다.
황창이 백제왕을 찌른 사실은 당시 신라가 백제에 큰 원한이 있었음을 말한다. 신라는 그 국력이 백제에 미치지 못해 늘 피해를 당했던 것이다. 특히 무령왕 이후 성왕때에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어 피차 양립 못할 절박한 상태가 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황창에 관한 이첨(李詹)의 고증이 있다.
‘을축년(乙丑年) 겨울에 내가 계림(경주)에 손님이 되어 갔는데 부윤 배공(裵公)이 향악을 베풀어 나를 위로하는데 탈을 쓴 동자(童子)가 뜰에서 칼춤을 추는 것을 보았다. 물어보니 말하기를, 신라 때 황창(黃昌)이라는 소년이 있었다. 나이 15,6세쯤 되어서 칼춤을 잘 추었는데 신라왕을 뵙고 말하기를 신이 원하건대 임금을 위하여 백제왕을 죽여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황창이 곧 백제로 가서 시가에서 춤을 추니 …… 살해되었다. 그의 어머니가 듣고 울부짖다가 드디어 눈이 멀었다. 사람들이 그의 어머니의 눈을 도로 밝아지게 하려고 꾀를 내어 사람을 시켜서 뜰에서 칼춤을 추게 하고 속여서 말하기를 창이 와서 춤춘다. 창이 죽었다는 전일의 말은 거짓말이다 하니, 그 어머니가 기뻐 울며 즉시 눈이 도로 밝아졌다 한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본국검법>의 배경은 신라의 화랑정신이며 이를 발판으로 신라에서는 훌륭한 검법을 창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본국검법>은 모두 33세(勢)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 격법(擊法)이 12수(首), 자법(刺法)이 9수로 치고 지르는 것이 모두 21수이다.
⇒ 진전살적세(進前殺賊勢) 3수
⇒ 향전살적세(向前殺賊勢) 2수
⇒ 후일격세(後一擊勢) 3수
⇒ 후일자세(後一刺勢) 2수
⇒ 일자세(一刺勢) 1수
⇒ 안자세(雁字勢) 1수
⇒ 직부송서세(直符送書勢) 1수
⇒ 발초심사세(發艸尋蛇勢) 1수
⇒ 표두압정세(豹頭壓頂勢) 1수
⇒ 좌우요격세(左右腰擊勢) 2수(각1수)
⇒ 장교분수세(長蛟噴水勢) 1수)
⇒ 우찬격세(右鑽擊勢) 1수)
⇒ 용약일자세(勇躍一刺勢) 1수
⇒ 시우상전세(牛相戰勢) 1수
이상이 격자지법(擊刺之法) 21수이고 내략(內掠), 외략(外掠), 방적(防賊) 등의 방어법이 있으며 지검대적세(持劍對賊勢), 금계독립세(金鷄獨立勢), 맹호은림세(猛虎隱林勢), 조천세(朝天勢), 전기세(展旗勢), 백원출동세(白猿出洞勢) 등의 기본 자세(格法)가 있다.
≪무예도보통지≫의 검보(劍譜)나 총도(總圖)를 보면 검법의 운용만을 순서에 따라 대충 그려 놓았을 뿐이고 세법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없어 그 전체의 묘를 터득하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이 검법이 실린 ≪무예도보통지≫의 편자가 <본국검법>에 관해 아는 것이 적었고 또한 병법을 알고 있었던 실무자 역시 조예가 깊지 못하였던 것 같으며 도보를 그린 화공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